스무살때부터 난 줄곧 남자친구가 있었다. 자랑이냐고? 뭐...솔직히 자랑이다. 공식적으로 남들에게 우리 사귀고 있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꼴에 연예인도 아니면서 꽁꽁 숨기고 아무도 모르게 만난 사람도 있고.... 지금 생각해보니 음... 결혼도 생각할 수 있고 누군가를 만나면 서로 책임이란 걸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순간에 만난 사람부터는 죄다 비밀 연애였었던 거 같다. (그래서 회사 사람들은 내가 연애도 못하고 사는 사람인줄 안다... 췟!)
어느 날 별 생각없이 휴대폰 갤러리에서 그동안 찍은 사진을 열어봤다. 졸업을 한 이후로는 누군가와 같이 찍은 사진이 별로 없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누굴 만나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마치 의도적으로 피했던 마냥 함께..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애인은 있었는데, 함께 여행을 다니지 않았던 것도 아닌데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은 거의 풍경...이거나 혼자 찍은 사진... 하다못해 그 흔한 셀카도 없더라... 왜 그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추억은 있지만 흔적은 남지 않은 내 연애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확실히 문제가 있긴 있었다. 스물 다섯 언저리에 만났던 남자는 1년 반이나 만나면서 내내 "난 널 정말 존중해... 넌 정말 소중한 사람이고 그래서 난 너랑 친구로 지냈으면 좋겠어..." 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가장 가까운 지인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아무도 모르게 서로 애인이 없는 상태로 1년 반을 지냈다. 그래서 정말 친구로만 지냈냐고? 우린 주말에 만났고 주로 저녁에 만났고 일요일 오전에 헤어졌다... 그 남자 교회를 갔어야 했으니까....^^;; 이 이야기를 아는 사람 대부분이 내게 "등신같은 X"라는 말을 숨기지 않고 말하는 걸 보면 내가 생각해도 상등신으로 굴었던 연애인 거 같긴 해... 여행도 가봤고, 같이 지내기도 했지만 단 한장도 같이 찍은 사진은 없다. 치열하게 싸웠고 치열하게 사랑했지만 흔적은 없다. 아주 완벽했지... 헤어진 후에도 첫눈 오는 날은 니가 생각난다며 개드립을 해댔던 그 남자와 헤어질 때도 내가 했던 말은 "난 아마 너와 다시 만나더라도 이렇게 치열하게 좋아하고 숨기지 않을거라고... 난 쿨하게...자체가 이해가 안된다고... 너는 거짓이었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고"
지금 생각하면 참 없어보인다. 헤어지자는 남자한테 그런 소리나 하고 있고... 뭐..지금도 그 남자는 내가 저와 함께 할 평생친구라고 여기는지 뜬금없이 저녁에 술마시러 온다며 전화하고 그런다. 확 와이프한테 전화해줄까보다... 하긴... 진짜 만날 때도 없던 흔적이 지금와 새삼 생기겠어? 청첩장 받으면서 생각했던 약 만 몇백가지쯤의 복수도 치졸하게 굴기 싫어서 다 포기했었는데...
그 이후에 만난 남자는....ㅎ 정말 흔적을 남길 수 없는 사람이고...
알아...나도 내가 바보같은 거... 냉정하지도 못하고 이성적인 판단조차 못하고 있다는 거. 그런데... 난 마음가지고 쿨하게 구는 거, 관심있는데 없는 척 의도적으로 애쓰는 거 정말 못하겠단 말이지... 그냥 홀랑 다 타버릴 때까지 열심히 태우고, 다 타고 남은 재에서 불꽃조차 못 살아나게 할만큼 열심히 하다가 진빠지고 다시 살아날 수 없을 때쯤 접을 참이야.... 그러고 나면 미련도 뭣도 안남겠지... 난 그렇게 사는 게 훨씬 익숙해...